닥터 홀의 가족은 아버지 윌리엄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 어머니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 그리고 셔우드의 아내 메리안 홀(Marrian Bottomly Hall, 1896-1991)의 의사 네 명을 말한다.

내한 캐나다선교사전시관을 세운 최선수 장로는 우연한 기회에 아들 셔우드 홀이 소천하기 얼마 전에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최 장로가 황해도 해주 출신인 것을 알고 “한국 축복, 한국 축복”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의 사역지가 황해도 해주였기 때문에 더 친근하게 여겼을 수도 있다. 이를 계기로 부인이었던 메리안과 그의 딸 필리스를 만나게 되었고 닥터 홀과 메리안이 소천 한 후에 그들로부터 받은 자료를 토대로 전시관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설립동기 참조)

아버지 윌리엄 홀과
어머니 로제타 홀

미국인이었던 로제타가 먼저 조선 땅을 밟게 되었고(1890) 캐네디언인 윌리엄은 이듬해(1891) 입국을 했다. 둘은 조선에서 결혼한 최초의 서양인이 되었다. 로제타는 서울에서 사역했고, 윌리엄은 평양으로 가 선교지 터를 잡았다.

윌리엄은 “하나님, 만약에 복음의 문이 열리는데 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제가 희생하겠습니다”라고 서원했는데 기도대로 순교하게 된다. 청일전쟁에 평양에서 벌어졌고 위험하니 모든 선교사들은 피신하라고 했지만 윌리엄은 끝까지 남아 상처입은 환자들을 돌보다가 열병에 걸려 순교하게 된다.

윌리엄이 순교 할 때 셔우드는 돌이었고 로제타는 임신 7개월이었다. 남편의 순교로 충격을 받은 로제타는 윌리엄과 함께 친정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 갔다. 돌아 갔지만 남편을 묻은 조선에 대한 마음을 잊지 못하다가 1897년 친척들의 후원으로 닥터홀기념병원(기홀병원)을 세우고, 본인도 자녀들과 함께 1898년 다시 돌아 왔다. 배 안에 있던 아기는 에디스로 남편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디스는 조선에 온지 6개월 뒤 이질로 사망하게 된다.

사랑하는 남편도 딸도 양화진에 묻은 로제타는 불행에 굴하지 않고 한국을 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 박에스더(본명 김점동)라는 조수를 미국에 데리고 가 최초의 한국인 여의사로 만들었다. 또 특수교육의 선구자로 맹인들을 위한 점자책을 최초로 만들었고, 최초의 여성의료 교육기관인 경성여자의학교를 설립했는데 훗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며, 동대문 릴리언 해리스 병원에서 사역했는데 훗날 이화여대 의대 부속병원이 되었다.

아들 셔우드 홀과 아내 메리안 홀

셔우드는 원래 사업가가 되려고 했다. 열 두 살 되던 해 평양에서 열린 평양대부흥집회였던 1907년 1월 하디의 집회에 참석하여 감동 받고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토론토의대를 졸업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갔다. 황해도 해주 구세병원에서 의료사역을 한 셔우드는 한국의 결핵 퇴치를 위한 기금마련을 위해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보급했다.

조선은 결핵이 만연되어 희생자들이 속출했는데 셔우드는 이 결핵퇴치를 위해 헌신했다. 그 이유는 로제타가 여의사로 키운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숨진데 대한 충격 때문이었다. 셔우드는 어려서부터 박에스더를 이모처럼 여기고 따랐는데 돌연 결핵으로 쓰러진 데 대해 조선의 결핵 퇴치에 앞장 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윌리엄 홀 당시 조선인 김창식 목사가 동역했고, 아들 셔우드 홀 사역 당시에는 김 목사의 아들 김영진 의사가 사역해 부자가 2대에 걸쳐 동역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셔우드는 소천 7년전 결핵퇴치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결핵협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으로 나갈 때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는지 입고 갈 옷이 없을 지경이었다. 친구들이 마련한 양복 한벌, 메리안은 친구들이 마련한 옷 몇 벌을 가지고 부부가 한국을 방문 했다고 한다.
소천 직전 메리안이 기증한 비디오테이프(분실)과 ‘조선회상’ 초판본, 그리고 셔우드의 딸 필리스가 기증한 유품들이 본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