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obert Grierson, 1868-1965
푸트, 맥래와 함께 캐나다장로교다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된 그리어슨은 맥켄지 순교 이후 소래교회로 가지 못했다. 이유는 미국과 선교지 분할협정을 맺은 캐나다 기독교단들이 함경도를 담당하기로 하여 이들은 함경도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어슨은 성진(현 김책시)에 선교부를 개척하였고 두만강 건너 용정에도 선교부를 개척했다.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로, 의대를 졸업한 의사로 헌신한 그리어슨은 성진에 제동병원, 용정에 제창병원을 세워 많은 병자를 돌보면서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으므로 일제로부터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또 음악가로도 활동하여 서양음악을 가르치며 최초의 밴드인 제성악단 설립, 운영하면서 서양 스포츠인 야구, 축구, 테니스 등을 보급하기도 했다.
William R. Foote, 1869-1930
푸트는 원산 지역에 선교부를 창설하고 원산중앙교회 등 많은 교회 개척, 원산보광학교, 원산남, 여학교 등 교육기관 설립하고 조선인 목회자 양성에 힘쓰며 함경남북도와 용정에 이르기까지 넓은 선교지역을 돌봤다.


Duncan M. MacRae, 1868-1949
맥래는 함흥지역에 선교부를 만들었다. 맥래는 첨음에 교단의 재정악화로 파송 취소 결정이 나자 학교 강당이 떠나가도록 “나는 조선에 갈 것이다. 조선에 갈 것이다. 태평양을 헤엄쳐서라도 갈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만큼 맥래는 부인(에디스)과 함께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목회 뿐 아니라 토목, 건축, 축산, 농업 지도에 헌신적이었다. 부부가 함흥영생남, 여학교를 설립했다.
Alexander F. Robb, 1872-1935
조선으로부터 온 맥켄지 선교사의 순교로 인한 공백을 메꿔 달라는 간절한 서경조의 편지를 신학교 학보에 실은 장본인은 당시 편집장이었던 럽이었다. 럽도 감동을 받아 부부가 조선 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원산, 북간도, 러시아까지 선교 영역을 확장한 럽은 원산 부흥운동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한국 부흥운동의 주역이 된다. 후일 평양신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