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세계 유일하게 한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개화에 앞장선 캐나다선교사님들의 발자취를 모아 ‘내한캐나다선교사전시관’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비전펠로우십(Vision Fellowship)에서 최초로 발굴한 역사적 사실이 ‘재일동포캐나다선교사’들이 일본에 가서 사역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그동안 일본에서 고통받던 한인들과 그들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캐나다 선교사들의 잊혀져 소멸될 뻔한 이야기를 발굴한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 조차 외면했던 재일동포만을 위해 지속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를 세우며, 억압받는 재일동포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지속적으로 도움을 베푼 나라는 캐나다가 유일하다. 1925년에 연합교단에 합류하지 않고 1/3만 남은 캐나다장로교단(PCC: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은 1927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가지 총 34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90여년이 넘도록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했으나 한국인이 주도적으로 교회를 이끌어 나가도록 뒤에서 지원하는 겸손한 태도로 고난에 동참하며 선교사명을 감당했다. 2008년 일본선교 100주년을 맞아 동경교회에서 개최된 기념예배에서 어느 장로는 동고동락하며 재일 한인들을 위한 선교사역과 인권운동에 투신한 캐나다장로교단과 파송 선교사의 이름 하나 하나를 부르며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면서 눈물을 쏟았다고 전한다.

재일동포 캐나다선교사 자료발굴의 단초

비전펠로우십(이하 VF)은 작년(2017년) 9월 우연한 기회에 캐나다장로교단 소속의 로버트 앤더슨(Robert K. Anderson, 한국명 안다손) 목사와 부인 프리실라 앤더슨(Pricilla Anderson)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목사 부부는VF 전시관을 찾아 재일동포를 위해 오랫동안 일본에서 사역했다고 하면서 본인이 쓴 ‘나의 구세주를 찬송하리(My dear Redeemer’s Praise)’와 ‘욱일승천기 아래 김치와 메이플 리브스(Kimchi & Maple Leaves, Under the Rising Sun)’ 두권을 VF에 기증을 했다.

그는 우리에게 일본에서 억압받고 있는 재일동포들을 위해 파송된 캐나다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루터 영(Luther L. Young, 한국명 영재형) 목사였고 이분의 전기가 바로 ‘나의 구세주를 찬송하리’ 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아닌 재일동포들만을 위해 많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일본에 가 헌신한 내용을 적은 책이 ‘김치와 메이플…’이었다. 우리는 며칠 내로 PCC에 있는 자료실을 뒤져 캐나다에서 일본으로 가 재일동포들을 위해 수고한 34명의 명단을 찾아냈다. 오랜 세월 캐나다인과 한국인에게, 아무도 모르게 감춰져 있던 감동의 스토리가 케케묵은 먼지를 떨어내고 슬며시 얼굴을 드러내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앤더슨 목사를 통해 아직도 생존해 있는 몇 분에 대해 소식을 알 수 있었다. 밴쿠버에 살고 있는 글렌 데이비스(Glen & Joyce Davis, 한국명 태비수) 목사 내외분과 작고한 존 매킨토시(John McIntosh, 한국명 맥인도) 목사의 부인 베쓰 매킨토시(Clarabeth McIntosh) 의 연락처를 받았다. 탈봇 목사를 비롯한 몇몇 분들은 노쇠하셔서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때마침 매킨토시 여사의 아들 데이빗(David McIntosh, 현재 일본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일하고 있음)이 사역 보고차 토론토에 들른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를 만나 일본 내의 재일동포 기독교인들의 현황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언제든지 일본에 오면 캐나다선교사들의 자료와 흔적을 찾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황환영 대표는 즉시 밴쿠버의 데이비스 목사와 매킨토시 여사에게 연락을 해 면담일정을 잡는 즉시 데이빗 선교사에게 연락해 3주간의 일본일정을 잡았다.

벤쿠버, 일본으로 향하다

드디어 2018년 1월 12일 밴쿠버로 가서 글렌 데이비스 목사와 베쓰 매킨토시 여사, 딸 쟈넷을 함께 만났다. 데이비스 목사는 부인 조이스와 함께 한국에서 3년간 한국어를 습득해 아주 능통했고 일본에서 남부지역 선교책임자를 맡으면서 후쿠오카한인교회의 담임으로 청빙받았고, 몇개의 한인교회를 개척했을 뿐 아니라 한국어로 능통하게 설교를 했다고 한다. 또 잠시 귀국하여 한인장로교회의 당회장을 맡기도 했었다. 그의 동지였던 고 매킨토시 목사가 일본에서 헌신적으로 사역한 사연을 듣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1년 매킨토시 목사 부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2001년까지 40년간 재일동포를 위해 목숨 걸고 사역하면서 한인들의 인권탄압과 차별대우에 대해 지문날인철폐운동과 같은 일들을 주도하고 일본 정부와 싸운 일에 대해 듣는 순간, 전혀 몰랐던 일에 대해 부끄럽고 감사하기도한 형용할 수없는 감사가 나왔다. 그는 이 일로 병을 얻어 2001년 귀국한 후 3개월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골 일부가 지금 한인장로교회에 묻혀 있다. 많은 자료를 기증받고 황 대표는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 신주쿠 호텔에 도착하니 늦은 시간임에도 데이빗이 기다리고 있었다. 촘촘하게 짜여진 일정표를 같이 의논한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재일대한기독교회(KCCJ: Korean Christian Church in Japan) 총무인 김병호 목사를 만났다. 김 목사는 일본 신학교에 유학 왔다가 KCCJ를 위해 일해 온 분으로 KCCJ의 산 증인이었다. KCCJ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듣고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데이빗 매킨토시 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데이빗은 전술한대로 존 매킨토시 목사와 베쓰 매킨토시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온타리오주 구엘프에서 태어나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일본에서 공부해 일본어에 아주 능통했다. 캐나다에서 주로 인권단체에 서 일하다 2011년 고베대지진 때 일본으로 가 구호사업에 활동하다가 현재는 일본 내 소수민족 인권단체인 CMIM(The Center for Minority Issues and Mission in Japan)의 책임자를 맡고 있다. 부모의 대를 이어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아서

다음날 아침 일찍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에 있는 오사카한인교회를 방문해 존 매킨토시 부부의 활약상에 대해 들었다. KCCJ의 역사 연구가인 이청일 원로목사와 오사카 KCCJ의 총무인 김송원 씨, 오사카한인교회 정연원 목사를 만나 루터 영 목사로부터 시작된 캐나다 선교사들의 활약상과 매킨토시 목사의 지문날인철폐운동의 원인과 전개 과정에 대한 상세한 증언청취와 자료수집을 했다. 저녁에는 청소년 시절 매킨토시 목사 부부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70대가 다 된 제자들이 모였다. 차별받던 일본 땅에서 자란 재일동포 2세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억울함을 다독이며 끝없는 사랑을 베풀었던 매킨토시 부부의 헌신, 지문날인철폐를 위해 일본 정부와 투쟁한 이야기의 전말을 들려 주었고, 모두가 ‘아버지, 어머니’라 호칭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제자였던 한 일본인 장로는 “그 분이 원하셨던 것은 언제까지 미움과 증오로 한국 · 일본이 대립할 것인가? 후손들의 세대는사랑으로 화합하고 평화롭게 공존해야 할 것이란 점에서 오사카의 빈민촌 다츠미 지역에 ‘화해의 집’이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화해의 집’을 찾은 후 신칸센을 타고 나고야를 방문했다. 원래 고베지역에서 캐나다 선교사들의 사역이 시작되었고 루터 영 목사의 족적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이고 그의 무덤도 있지만 일정상 방문을 하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웠다. 나고야한인교회는 6~7층규모의 대단히 큰 교회였다. 작년 12월 31일 담임 자리에서 은퇴한 김성제 목사가 반가이 맞아 주었다. 나고야한인교회는 한인이 세운 교회이지만 교회의 부대사업으로 양로원과 유치원을 운영해야 했는데 한국사람이 운영 주체란 이유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설립인가를 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인가를 받아야 정부로부터 지원도 얻고 운영도 가능한데 많은 재일동포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로버트 앤더슨 목사가 이사장 자리를 맡으며 인가 신청을 해서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고 각종 혜택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앤더슨 목사는 나고야한인교회 협동목사로 사역하면서 다치가와한인교회, 쿠와나교회를 맡았고, 부부가 함께 영어성경반을 운영, 영어를 가르치고 교회가 든든하게 자리잡도록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왕성한 필력으로 재일동포를 위해 일한 캐나다선교사들의 역사에 대해 많은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번 역사 발굴여행의 모든 기저에는 앤더슨 목사의 기록을 토대로 했음을 고백한다. 앤더슨 부부는 세차례에 걸쳐 귀국했다가 다시 초청에 응해 일본으로 돌아 오고 하여 1999년까지 오랜동안 사역했다가 귀국해 은퇴하여 현재 94세임에도 PCC의 가장 어른으로 왕성하게 일하고 있다.

재일대한 기독교회의 역사 속의 캐나다선교사

올해로 110주년을 맞는 재일대한기독교회(KCCJ)는 그 태생이 1882년 조선 정부 수신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이수정(李樹廷, 일본명 리주테이)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수정은 사절단이 다 돌아 간 뒤에도 혼자 남아 유학하던중 일본 농학자 津田仙(츠다센)에게 복음을 듣고 개종, 세례를 받았다. 1883년 그의 주도 하에 조선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선인교회를 개설하고 예배 드렸다. 또 북미 교회들에게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 요청하여 미국의 언더우드(장로교), 아펜젤러(감리교) 선교사가 조선에 파송되도록 영향을 미쳤다. 미국성서공회는 그의 학문실력을 인정, 신약 4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번역하도록 후원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 역본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감으로 우리나라는 선교사가 파송되기도 전에 성경이 번역된 나라가 되었다. 1886년 이수정은 귀국 후 처형 됨으로 조선인교회는 중단되었으나 그후 재일 한인교회의 뿌리가 되었다.

이후 1906년 늘어나는 재일 유학생들을 위한 조선기독교청년회(YMCA)가 토쿄에 설립되어 예배를 드리다가1908년 평양에서 도일한 정일로 장로, 김정식 YMCA 총무와 유학생들이 동경교회 창립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한석진 목사를 1909년에 임시로 파견했다.

재일동포 한인교회의 특징을 말하자면 교단파벌이 전혀 없다는 점이 특색이다. 이는 1911년 미국 선교사 브루엔(Henry Bruen) 목사가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재일기독교 선교에 협력하자고 주장한 데 기인한다. 각 교단의 합의를 얻어 후원을 시작함으로 오늘날까지 재일 한인교회는 단일 교파를 유지하게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식민지 조선의 노동력 이용을 위한 조선인 이주정책 시행으로 재일동포 구성은 유학생 중심에서 노동자 중심 구조로 바뀌면서 거주지역은 일본 전역으로 퍼졌다. 따라서 요코하마, 고베, 오사카, 교토, 오사카, 나고야 등지에도 전도로 인한 교회가 생겨났다.

1924년 조선에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FC, The Federal Council of Churches and Mission in Korea, KNCC의 전신)를 발족하고 1926년 오택관 목사를 큐슈에 파견했다. 재일 조선인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FC에서는 1925년에 설립된 캐나다 연합교단(United Church in Canada)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지만 연합교단은 재정상 한국선교 이외의 지역을 후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연합교회는 캐나다에 남아있는 캐나다장로교단(PCC)에 이 요청을 전했고, 1/3로 줄어든 PCC는 부족한 재정상태에도 불구하고 1926년 FC 산하 협력사업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PCC의 루터 영 선교사 파송

이 때 파송하기로 결정된 이유는 루터 영(Luther Lisgar Young) 목사가 마침 캐나다에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 영 목사는 누구인가?

그는 1895년 노바스코샤 픽토우 카운티 밀스빌에서 태어나 달하우지대학, 핼리팩스 장로교신학대학을 졸업, 목사안수를 받고1906년부터 한국 원산, 함흥 등지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복음주의자였던 그는 1925년 캐나다장로교회 2/3가 다른 교파와 캐나다연합교회를 형성하자 진보성향의 연합교회 가입을 거부했고, 베시, 맥도널드 선교사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중 일본 요코하마에서 재일 조선인들이 목자없는 양 같이 방황하는 것을 보고 캐나다장로교단에 자신의 파송을 요청했다.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인들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을 찾던 PCC와 루터 영의 열정이 맞아 파송선교사로 결정되자 어떤 형태로든 조선인을 위해 헌신하길 원했던 루터 영은 뛸듯이 기뻐했다.

1927년 루터 영 목사는 부인 미리암 영(Miriam F. Young, 영 목사의 두번째 부인으로 첫째부인 캐서린 영은 1919년 한국에서 사망)과 함께 일본 고베로 갔다. KNCC 산하에서 일을 했지만 PCC의 측면 지원을 받은 루터 영의 사역은 날로 확장되어 기존의 교회들은 일종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였고,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졌고, 주요 조선인 밀집지역에는 유치원과 유아학교들이 설립되었고, 성경공부와 지도자훈련을 위한 대회들이 지역과 지방에 따라 개최되었다.

그는 팀을 이뤄 사역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 중에는 엘라 앤더슨 양, 말콤 매케이 목사, 글래디스 머피(후일 말콤 매케이 목사 부인) 양, 에델 맥도널드 양, 진 맥리언(후일 폴 럼볼 목사 부인)이 있었다. 이들은 1930년부터 1934년 사이에 충원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열정적인 노력으로1927년부터 1934년 사이에 교회와 교인 수가 2~3배나 증가, 45개 교회와 2,300명, 야간학교 24곳, 유치원 9곳으로 늘었다. 강한 조직이 필요했던 영 목사는 KNCC와 PCC와의 논의 끝에 1934년, 재일조선기독교회 창립하여 교단을 독립시키고 초대 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당시 영 목사가 PCC에 사역보고한 내용을 보면 “도쿄(東京)를 비롯하여 나고야(名古屋), 큐슈(九州), 호카이도(北海島)까지 전도자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라고 기술 될 정도로 새교회들이 개척되었고 교인이 4,000명으로 느는 등 일본 전역에 복음을 활발히 전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기독교 탄압

기쁨 넘치는 복음전파의 사역은 오래가지 못했다. 제국주의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정치적, 경제 그리고 군사적인 힘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외국인들과 ‘외국’ 종교는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1939년 일본 정부는 ‘종교단체법’을 통과시켰다. 명목상으로는 종교단체들을 정부에 등록하라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내 모든 종교를 장악하고 일본 국가종교인 신토(신도,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를 확대시키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정부의 요구는 작은 교단들이 더 큰 교단들과 통합하여 모든 교회들이 등록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한국인 교회는 예배를 포함한 모든 모임에서 ‘국어’ 즉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루터 영 목사와 조선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장로교 지도자들과 회동하여 한국인 교회들이 여전히 그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는 통합 방법을 짜 냈다. 그러나 최종 합의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1940년 정부가 개입하여 모든 장로교회들이 일본장로교단과 하나로 합치라고 요구했다. 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조건으로 기미가요(일본국가)와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캐나다장로교회 선교사들은 그들의 참여나 교회사역이 ‘외국인’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갈수록 일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다가 전쟁 발발 전날 밤에 모든 선교사들은 캐나다로 돌아가라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재일 조선인교회의 종말처럼 보였다. 교회들은 폐쇄되었고 일부 교회들은 일본인 목사들이 종종 희생적으로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지도자의 부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점차 많은 한국인 목사들이 수감되거나 무기공장으로 징발되어 갔다.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군대로 빠져나간 일본 근로자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징용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종전 직전에 재일한국인의 숫자가 236만명으로 비공식적으로는 270만명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돌아온 캐나다 선교사들, 영 목사의 죽음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한국인들은 60만명을 남기고 모두 고국으로 귀환했다. 대부분의 귀환자들이 기독교인들이었고 목사들이었다. 재일한국인교회의 장래는 없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전쟁기간 동안 일종의 ‘지하’에 숨었던 한국인교회가 있었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남은 3명의 목사와 몇몇 복음 전도사들이 잘려나간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남아 있다가 함께 모여 남은 자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이들 지도자들은 21개 교회를 모아 재일본조선기독교연합회(KCCJ의 전신)를 창립하고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가입한 일본기독교연맹에서 탈퇴했다. 이들은 1948년 재일대한기독교회(KCCJ)로 개칭하고 부족한 목회자의 공백을 메꿀 요량으로 캐나다장로교단(PCC)에 구원을 요청했다.

1948년에 재일한국인들의 호소를 듣고 PCC는 선교위원회의 앨런 먼로(Alan J. Munro)와 여성선교회의 로라 펠톤(Laura K. Pelton)으로 구성된 방문단을 파견하여 현지 실태를 파악하도록 했다. 그들은 거의 절멸된 교인들과 손상된 교회 건물들에도 불구하고 옛날 힘을 회복하고 간절히 미래로 나아 가고자 하는 한인 교회의 열심을 파악했다. 일본 신학교에서 교육받고 한국에서 안수 받은 오윤태 목사,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일본인 전윤복(오다 나라지) 목사, 오사카의 박명정 복음전도사와 같은 지도자들, 그리고 열정이 넘치는 몇몇 신학생들이 남은 희망이었다.

캐나다 방문단은 PCC가 계속하여 재일 한국인 교인들을 지원해 줄 것과 ‘선교사들’ 특히 루터 영을 되돌려 보내 줄 것을 요청하도록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캐나다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고 재파송이 결정되자 74세가 된 영 목사가 연락이 되어 1949년 일본 현장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폴과 진 럼볼(Paul & Jean Rumball) 목사 부부, 도널드 파월(Donald & Marion Powell) 목사 부부, 로저 탈봇(Roger & Donna Talbot) 부부와 다른 이들이 뒤따랐다. 선교사업 재개의 초기단계부터 ‘캐나다선교부’가 재조직 된 KCCJ와 새로운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캐나다선교부는 모든 사역에서 한국인을 전면에 내세우고 캐나다 선교사는 직접 일을 할지라도 뒤에서 돕는 역할에 머무를 것을 결의하였다.

그 이듬해인 1950년 2월에 루터 영이 과로로 죽자 교회들과 선교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재일동포를 사랑해 목숨걸고 일하던 영 목사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두는 고베의 나다개혁교회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외국인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는 생존시에 자녀들에게 늘 “천국에 오거는 나를 한국인들 가운데서 찾으라”고 유언처럼 이야기 했다고 전해진다. 부인 미리암 영이 미국에 살고 있는 딸에게 돌아가 버리자 선교부의 정책과 재정에 관한 문제들은 럼볼 목사 부부가 담당하여 처리했다. 이후에PCC와 KCCJ는 ‘보내고’ ‘받는’ 교회들이라기 보다는 ‘자매교회’로 인정되었다. 이 관계는 오랜 기간 유지되었다. 뒤를 이어 일본 전역에 퍼져 복음을 전한 캐나다 선교사들은 한인 지도자 인재양성을 위해 ‘장학금’ 제도를 만들어 한국인 지도자들이 캐나다에서 신학과 목회 부문에서 석, 박사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제도로 인해 한인교회의 교회를 이끌어 갈 이인하, 오윤태, 김덕성 등 14명의 젊은 지도자들을 양육해 교회의 발전을 견인하도록 했다.

선교 110주년을 맞는 한인교회들

전술한 바와 같이 캐나다선교사들은 한인교회들의 발전과 자립을 위해 물심 양면으로 도왔고, 1960년대 후반부터 눈 뜬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한인교회란 주제로 선교정책의 전환을 맞게 된다.

재일대한기독교회(KCCJ)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일본기독교협의회(NCCJ),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등에 가맹함으로 활동의 외연을 넓혀 나갔다. 1973년 일북미선교협력회(JNAC)에 가입하면서 소수민족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74년 재일한국인문제연구소(RAIK)를 설립하여 재일동포의 인권보호와 일본내 소수민족인 아이누, 오키나와, 외국인 노동자들의 친권보호와 차별철폐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캐나다 선교사들은 2선으로 물러나 행정, 재정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캐나다선교부는스스로자세를 낮춰 KCCJ의 산하로 들어가 ‘동역 선교사’ 또는 ‘형제사역자’로 불리워지는 것을 즐거워 했다.

캐나다장로교회의 선교사 파송은 2001년 매킨토시 목사의 귀국 이후 끝이 났고, 지금까지 150년 역사의 캐나다여성선교회(WMS)와 함께 그의 아들 데이빗 매킨토시를후원하여 소수민족 인권사업인 RAIK를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로버트 앤더슨 목사는 그의 기고문 ‘불타는 떨기나무와 지게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것처럼 미래에도 위기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위기들이 닥칠 때 캐나다장로교는 주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된 자들로 재일 한국인 교회의 옆에 서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목표를 마음에 품고: 복음의 선포와 고통받는 세상의 치유를 위해.”

재일동포 캐나다 선교사 전시관의 개관

작년 9월부터 오늘날까지VF는 오직 재일동포캐나사 선교사들의 정신을 어떻게 구현하고 세상에 밝힐 것인가에 대해 발로 뛰고 자료를 수집하며, 증언을 청취하면서 매진해 왔다. 그 분들의 업적, 행적들을 보면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할 뿐이다. 물론 캐나다에 살면서 재일동포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이 별무관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조선이(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조차 모르는 선교사들이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인을 사랑하며 복음과 신문화, 신문물을 전해 준 내한캐나다선교사들의 이야기만 해도 감동적인데, 재일동포까지 찾아가 34명(매킨토시 목사의 아들까지 35명)이나 고귀한 삶을 희생한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이지 않은가?

현재 재일동포 인구 100만에 가깝고 한인교회가 100여개를 넘는 현재 재일본한인선교 110주년을 맞는 재일한국기독교회의 밑바탕에는 캐나다 선교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부흥이 가능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한인교회들 뿐 아니라 한국의 기독교도 이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일동포들이 여러 정치적인 이유와 한국교회의 연약함 때문에 돌보지 못해 버림받은 고아와 같이 고난 당할 때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며 일본의 차가운 박해와 탄압 가운데서도 방패가 되어주고 피난처가 되어준 이웃이 바로 예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캐나다 선교사들이었다. 교회의 부흥과 인권보호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공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히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수백, 수만갈래의 한국 기독교단과 달리 단일교단 아래 한인들을 앞장 세우고 공을 치켜세운 그들의 자세야 말로 오늘날 선교의 대국이라 자랑하는 한국교회와 캐나다 한인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가 아닐까?

오늘, 비전펠로우십은 내한캐나다선교사전시관 한 귀퉁이를 헐어 재일동포선교사들의 사역을 위한 작은 기념전시실을 마련했다. 재정적인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간의 모든 자료와 사실들을 정리하여 주어진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꾸며내었다. 그동안 보관했던 선교사들의 유품은 2층 회의실을 헐어 새롭게 단장을 했다. 2018년 9월 22일에 감사의 개관예배를 드렸고 특별히 일본에서 재일한국기독교회(KCCJ)의 김병호 총무와 현역 캐나다 선교사 데이빗 매킨토시가 딸과 함께 참석해 주었고, 생존하신 로버트 앤더슨 목사 부부와 딸, 또 캐나다장로교단의 임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감격의 예배를 드렸다.

캐나다장로교회(PCC)의 한인교회들 중 본한인교회, 디모데교회와 한인장로교회, 해외한인장로교회(KPCA)의 영락교회, 밀알교회, 미주예수교장로회(KAPC)의 한우리교회가 적극 협조를 해주어서 감사하다. 우린 캐나다 선교사님들의 헌신이 우리 한인사회에, 교인들 안에, 또 우리의 후손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고 가슴에 새겨지는 것만이 보람이 될 것이다.

참고자료 :

-My dear Redeemer’s Praise, Robert Anderson

-Kimchi & Maple Leaves, Under the Rising Sun, Robert Anderson

-불타는 떨기나무와 지게, Robert Anderson

-전북선교 120주년과 예수병원 설립 115주년 기념 포럼

-나그네를 섬겼던 선한 牧者, 김병호 목사